순창임씨 연원
임씨(林氏)는 중국의 인문초조(人文初祖) 헌원황제(軒轅皇帝)의 후손인데 득성조(得姓祖)는 견공(堅公) 초명(初名)은 천(泉)이고 자(字)는 장은(長恩)이다. 세계임씨(世界林氏)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아버지 비간왕자(比干王子)와 어머니 정실부인 진씨(陳氏)에 의하여 태어났는데 그 사록(史錄)은
비간왕자(比干王子)는 은(殷)나라 32대(代)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으며 33대(代) 제을대왕의 동생(同生)이시며 기자공(箕子公)의 형님(兄任)이시고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제신(帝辛))의 숙부(叔父)이시다. 노(魯)나라를 세운 미자(微子)는 주왕(紂王)의 동생(同生)되신 분이다.
비간공(比干公)의 조카인 주왕(紂王)은 방탕(放蕩)하여 폭정(暴政)을 일삼았다. 이에 비간공(比干公)은 주왕(紂王)에게 여러 번 직간(直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간(諫)하여 따르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서 충성(忠誠)을 다하리라 하고 간(諫)하니 주왕(紂王)은 숙부(叔父)인 비간공(比干公)을 주살(誅殺)하여
심장을 베고 얼굴을 태웠다. 그때 비간공(比干公)의 정실부인 진씨(陳氏)는 잉태(孕胎)한지 삼개월(三個月)이 되었는데 주왕(紂王)의 화(禍)를 피하여 목야(牧野)의 장림산(長林山) 석실(石室)에 피신하여 아이를 낳아 이름을 천(泉)이라 하였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과 크게 싸워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패하여 자살하자 주무왕(周武王)은 나라이름을 주(周)라고 하고 비간묘(比干墓)에 동반명(銅盤銘)의 표(表)를 세우고 그 후사를 찾으니 진씨(陳氏)부인이 세 살 된 천(泉)을 안고 주무왕(周武王)을 맞이하니 장림산(長林山)
석실(石室)에서 태어났다하여 임씨(林氏)로 사성(賜姓)을 하고 이름을 견(堅)이라 하였다. 그리고 공작(公爵)으로 봉(封)하고 박릉(博陵)을 식읍으로 정하니 이 박릉(博陵)은 임씨(林氏)의 발상지(發祥地)이며 견공(堅公)은 세계임씨(世界林氏)의 일세조(一世祖)가 되었다. 그 후 공자(孔子)는 은(殷)나라에 비간(比干), 기자(箕子), 미자(微子)를 삼인(三仁)이라 칭하였고 그 중 비간(比干)이 으뜸이라 하였으며 보검(寶劍)으로 은비간묘(殷比干墓)라 새기었다. 당태종(唐太宗)은 비감묘 앞을 지나다가 비간에게 태사(太師)를 추증(追贈)하고 충렬공(忠烈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원나라 4대 황제인 인종(仁宗)은 비간(比干)의 석상(石像)을 만들게 하였으며 청(淸)나라 고종(高宗)은 하남(河南)의 은태사(殷太師) 비간묘(比干墓) 앞에 어필(御筆)을 날려 시(詩)를 바쳤다. 우리나라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인 충절공(忠節公) 휘(諱) 팔급(八及)은 은(殷)나라 비간공(比干公)의 후예이시며 당나라 구목연파(九牧衍派) 제육방(第六房)인 온공(縕公)의 고손자(高孫子)이고 문범공(文範公)의 아드님으로 당(唐)나라 때 복건성에서 태어나 용도각(龍圖閣)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벼슬로 시작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간신배들의 참소로 칠학사(七學士)와 함께 해동신라(海東新羅)로 와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용주방에 세거하게 되었다. 신라(新羅)의 이부상서(吏部尙書) 벼슬에 오르고 변방의 외적을 막은 공으로 충절공(忠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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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林氏)는 현재 이십사관(二十四貫)으로 분관(分貫)되었으며 백만(百萬)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창하여 한국십대성(韓國十代姓)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순창관(淳昌貫)도 그 중의 한 관(貫)으로 관조순창군(貫祖淳昌君)은 우리나라 임씨(林氏) 도시조(都始祖)인 충절공(忠節公) 휘(諱) 팔급공(八及公)의 19세손이고 고려 현종 시에 금자광록대부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이르신 부안군(扶安君) 휘(諱) 계미공(季美公)의 십일세손(十一世孫)이며 고려 대문호이시며 봉익대부삼사사(奉翊大夫三司使) 상장군(上將軍)에 추증(追贈)되신 절의공(節義公) 휘(諱) 춘공(椿公)의 육세손(六世孫)인 휘(諱) 중연공(仲沇公)으로 찬성사(贊成事)로서 정동성사를 섭행한 고려공신이었다.
그 연원(淵源)을 살펴보건대 중연공(仲沇公)의 아드님인 휘(諱) 선미공(先味公)은 자(字)는 양대(養大) 호(號)는 휴암(休菴) 또는 두문재(杜門齋)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正公)인데 고려말(高麗末)낭관(郎官-정오품(正五品))을 역임하고 태학생(太學生)이 되었는데 1392년 고려가 망하게 되자 오정문 밖 두문동 산골짜기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항절불굴(抗節不屈)하고 분사순절(焚死殉節)하였다. 이때에 세 아들이 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져 장자인 효자공(孝子公) 휘(諱) 용배(用培)는 순창에서 은거하였는데 그의 아드님인 남부교수공(南部敎授公) 휘(諱) 치지(致之)가 화순(和順)에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으며 용달공(用達公)은 홍성(洪城)에 각각 은거하여 세거지를 이루었다.
고려가 망한지 338년 후인 영조 6년(1730)과 영조 16년(1740)에 고려왕조에 충성한 두문동 의리를 드러낸 충신의 유적지라 표창하니 화순(和順)에 종인(宗人) 송계공(松溪公) 휘(諱) 시준(時儁)의 증손인 윤공(潤公)이 1746년에 향리의 각 종인이 보유한 사첩(私帖)을 수집 정리하여 초첩(草帖)을 만들어 서해를 통해 개성(開城)을 방문(訪問) 참봉공(叅奉公) 서추(西樞)를 만나 같은 선조의 자손임을 확인하고 족보를 편찬코자 하였으나 불의에 타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 46년간에 걸쳐 화순종인 필록(弼祿)이 개성을 왕래하면서 족보(族譜) 발간을 추진한 결과 1789년 기유년에 개성에서 덕유(德有)와 경(璟) 두 종인이 개성종인의 초첩(草帖)을 지니고 화순에 찾아와 화순 종인 경일(景日)과 더불어 임중연(林仲沇)공을 일세조로 순창임씨세보(淳昌林氏世譜)를 발간하게 되었다. 따라서 순창관(淳昌貫)이 정립되었다.
그 후 홍성종인과 합보하여 110년간은 초보(草譜)와 같이 순창임씨(淳昌林氏)로 지속되었는데 1901년 신축보(辛丑譜) 수보시 순창 종인과 합보하면서 평택임씨세보(平澤林氏世譜)로 개칭하고 일세조(一世祖)를 충절공(忠節公) 휘(諱) 팔급공(八及公)의 육세손인 득우공(得雨公)으로 족보를 발간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지속되고 있으나 구보(舊譜)의 선계(先系)가 잘못된 점이 발견되어 다음 수보(修譜) 시 우리나라 임씨의 대표적 분관 중조(中祖)인 평찰품사(評察品事) 충선공(忠宣公) 휘(諱) 몽주공(夢周公)을 일세조로 수보하기로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