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무왕시 기자 종래설(武王時箕子從來說) 시조동도(始祖東渡) 시기에 관하여도 양설이 있다. 그 하나는 주(周)나라 무왕(武王) 년간에 기자(箕子)를 따라 동도(東渡)했다는 무왕시 기자 종래설(武王時箕子從來說)과 당(唐)나라 말기에 동래(東來)하였다는 당말동도설(唐末東渡說)이 있다.
무왕시 기자종래설(武王時箕子從來說)에 의하면 우리 임씨는 동방의 외래성(外來姓)으로써는 가장 오래된 씨족으로써 주(周)나라 무왕원년(武王元年) 서기 기원전 一一二二년에 기자(箕子)가 동래할 때 기자(箕子)를 따라 동래하여 우리나라 임성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로써 학사공께서 은나라의 태보(太保)로써 큰 공(功)을 세움에 따라 팽성후(彭城侯)에 봉하여 관향(貫鄕)을 받은 후로 자손이 크게번성하여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상은 예천 임성보(醴泉林姓譜)에 기록되어 있다.
我林東方舊族肇自周武王元年箕子東來時鼻祖諱八及以殷王太保樹大勳封彭城侯自受貫裔孫蔓延國中其麗不億矣 |
|
이 설은 임팔급(林八及)이 당(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나이 十八세의 어린 나이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는데 군소간배(群小奸輩)의 모함을 받고 동료 칠(七)인과 함께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오시어 팽성용주방(彭城龍珠坊)에 닻을 내리시었다.
신라(新羅)에 출사(出仕)하여 관직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적병(賊兵)이 변방(邊方)을 침입하므로 공(公)이 분연히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始祖諱八及仕於唐朝年十八爲翰林學士自唐被讒見逐與同德七賢浮海來泊彭城龍珠坊出仕新羅官至吏部尙書時賊兵侵邊公奮討焉
또한 평택임씨보서부록(平澤林氏譜序附錄)을 보면 다음과 같이 더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夫吾林之姓先有中華之林又有東方之林國雖異邦其淵源則一也始祖翰林學士公在唐文宗朝以忠直枉被群小之讒與同僚七人俱渡東海始至新羅先定國家危亂後以家平澤龍浦里仍居焉我東之林自此始矣歷羅麗距今千有餘年之間子姓蕃衍于八域者其麗不億而或以所居之地或以受封之邑各爲貫鄕己餘十數皆莫非學士公之後裔亦莫非平澤之支流也
대저 우리 임씨(林氏)의 성(姓)에 먼저 중화(中華)의 임씨가 있고, 또 동방(東方)의 임씨가 있으니 나라는 비록 다르나 그 연원(淵源)은 한가지이다.
시조 한림학사공(翰林學士公)께서 당(唐)나라 문종조(文宗朝)에 충직(忠直)한 분으로써 간사(奸邪)한 소인(小人)들의 참소(讒訴)를 입고 동료(同僚) 칠(七)인으로 더불어 함께 동해(東海)를 건너와 비로소 신라(新羅)에 이르러 먼저 국가의 위란(危亂)을 평정(平定)하고 지금의 평택 용포리(龍浦里)에 집을 정하여 살으시니, 우리 동방의 임씨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 천여 년 사이에 자손이 번성하여 팔역(八域:팔도(八道))에 사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바 혹은 거주하는 지명(地名)으로 혹은 봉작(封爵)받은 고을로써 각기 관향(貫鄕)을 삼아 이미 십여(十餘) 관향이 있으니 모두 학사공(學士公)의 후예가 아님이 없으며 또한 평택(平澤)의 지류(支流:분파(分派))가 아님이 없다.
|
서하공문집(西河公文集)에 의하면 후당(後唐) 명종(明宗) 때를 동도시기(東渡時期)로 하고 있다. 이 시기(時期)는 서기九二六년에서 서기九三三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신라(新羅)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 때에 해당된다. 따라서 동도설(東渡說)로서 이상과 같이 주(周)나라 무왕(武王) 원년(元年) 동래설(東來說)과 당말(唐末) 동도설 중에도 당(唐) 문종시(文宗時) 동도설과 후당(後唐) 명종시(明宗時) 동도설이 있으나 이 세 가지 설이 다 함께 동 방임씨(東方林氏)의 시조(始祖)는 학사공(學士公) 팔급(八及)으로 중국(中國)에서 우리나라로 동도(東渡)하여 오시었다는 사실은 동일하며 모든 임씨(林氏)의 족보(族譜)와 기록(記錄)이 일치함으로 정확한 동도시기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주(周)나라 무왕(武王) 원년(元年) 기자종래설(箕子從來說)은 지금으로부터 약 三一○○년 전에 동래(東來)했다고 하는바 우리 임씨(林氏)가 동방(東方)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이라는 데는 이의(異義)가 없겠으나 이론상(理論上)의 문제가 생긴다. 즉 득성설(得姓說)에서 비간(比干)의 설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견(堅)이라는 분이 장림산(長林山)에 은거(隱居)하였던 시기이므로 동래(東來)한 시조(始祖)가 견(堅)이라면 몰라도 팔급(八及)이라면 너무도 애매한 이론이 되고 득성(得姓)을 신인설(神人說)로 하는 데는 신인(神人)이 누구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고 혹 족보(族譜)에 온(蘊)을 시조로 하는 경우가 있으나 먼저 언급한바와 같이 온(蘊)이란 분은 당(唐)나라 중흥기(中興期)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서하공(西河公) 문집(文集)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에 이백(李伯)이 친구 장위(張渭)와 함께 낭관호(郞官湖)에서 놀았고 임온(林蘊)은 구양첨(歐陽詹)과 같이 장안(長安)에서 달맞이를 즐겼다하나 그러나 건원(乾元) 정원(貞元) 이후로는 달맞이하는 풍속이 없어져서 오륙백년 동안 볼 수 없었다.
금년 중추(仲秋) 하루전날 이군담지(李君湛之)가 나에게 글을 보내어 하는 말이 내가 오늘 저녁에 술을 갖추어 명월(明月)아래 잔을 주고받으며 우리집 고사(故事)를 다시 닦아볼까 하는데 자네도 제남(濟南:임온(林薀)의 호(號))의 후손이 아니던가 어찌 옛 정(情)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季終孟始而炎冷之氣得其中焉故以八月之望修翫事者舊矣李伯與故人張渭遊於郞官湖林薀與歐陽詹賞于長安自乾元貞元後翫事廢而不修者幾五百餘年矣中秋先一日李君湛之抵余書曰吾用此夕將釃酒以翫明月復修吾家故事子非濟南後乎安得而忘情余遂
따라서 이군담지(李君湛之)가 서하공(西河公)을 가리키며 자네도 제남(濟南:임온(林薀)의 호(號))의 후손이 아니었던가 한 것으로 보아 임온(林薀)은 당(唐)나라 분이였으므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시 기자종래설(箕子從來說)은 타당치 못하다고 본다.
둘째는 당말동도설(唐末東渡說) 또는 후당동도설(後唐東渡說) 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서하공(西河公)이 一一三八년에서 一一七一년대 분으로 선조동도(先祖東渡)후 불과 二~三백년 내에 후손의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듯 하다. 팔급(八及) 시조(始祖)의 사적(史蹟)에 신라(新羅) 신덕왕(神德王) 五년(九一六년) 또는 경순왕(敬順王) 때인 九二七년~九三五년대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셨다고 볼 때 귀화(歸化) 즉시 벼슬을 주 었을 리 없고 수년이 지나면서 낮은 벼슬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로까지 오른 것으로 추측컨대 최소한 十여년전에 귀화(歸化)했을 것이다.
문헌에는 고구려(高句麗)를 거쳐 신라(新羅)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남의 나라를 거쳐 타국(他國)으로 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 당시 정치상황으로 보아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궁예(弓裔)와 신라(新羅)는 대치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쳐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평택용주방(平澤龍珠 坊)이 신라(新羅)의 영토(領土)일 당시 동도(東渡)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후당동도설(後唐東渡說)은 이론(理論)상 설득하기 대단히 어렵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中國)의 정치상황을 보면 九○七년에 당(唐)나라가 망하고 후당(後唐)이 이어졌으나 九一六년부터 九六七년까지는 五대十국이 난립하고 송(宋)나라가 건국하기 전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였으며 우리나라도 또한 견훤(甄萱)이 전주지방(全州地方)을 근거로 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컬었고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을 중심으로 하여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웠고 서기九一八년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고 九三六년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중국은 거란(契丹)과 요(遼)가 건국된 시기이다.
서하문집(西河文集)에서 후당 명종(明宗) 때 팔급(八及) 시조가 동도(東渡)했다 하였으나 이 시기는 九二六년에서 九三三년 사이이므로 이미 이때는 신라(新羅)는 이미 쇠퇴(衰退)해지고 평택용포동(平澤龍浦洞)이 신라(新羅)의 영토가 아니었을 때이다.
따라서 당말동도설(唐末東渡說) 즉 당(唐)나라가 망하기 직전 九○○년대 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文獻)으로는 팔학사(八學士) 중 설인경(薛仁敬)의 동도시(東渡詩)에서 이씨(李氏)는 당묘(唐廟)의 운수가 다함이여! 현사(賢士)들이 참소를 당하는도다(仙李運盡兮賢士被讒)라고 쓴 글귀로 보나 유전(劉荃)의 시(詩)에서 이조(二祖) 즉 기자와 미자가 바다로 들어감이여! 은(殷)나라가 망했도다.(二老入海兮 殷道衰亡)라고 한 것 등으로 보아 당말(唐末) 직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리 문헌(文獻) 중 칠현(七賢)이 바다를 건너 팽성 용주방에 자리를 잡았다.(七賢浮海來泊彭城龍珠坊)라는 글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中國)과 우리나라와 해상교역지로서 가장 가까운 거리가 당(唐)나라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덩저우라 일컫는바, 신라(新羅)의 아산만(牙山灣)을 통한 팽성(彭城)이므로 당(唐)나라와 신라(新羅)와의 모든 문화교역이 이 통로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통하여 바다를 건너와 평택 용주방(龍珠坊)에 자리 잡기가 쉬웠을 것이다.
|
○ 임씨의 득성유래는 비간(比干)공(公)이 정설(定說)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全世界) 임씨(林氏)가 인정(認定)하고 있다. 비간공은 은(殷)나라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시다. 비간공이 은말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貞夫人) 진씨(陳氏)는 임신 중에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며 살다가 득남(得男)을 하니 천(泉)이라 이름을하였다. 은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건국(建國)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자(子) 천(泉)을 찾아 임씨(林氏)의 성(姓)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사(賜)한 것으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전세계(全世界) 임씨(林氏)의 태시조(太始祖)로 모시고 있다.
○ 도시조(都始祖) 임팔급공(林八及公)의 동도설(東渡說)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고려 건국 九一八年에 조각(組閣) 명단 중에 임희(林曦)를 비롯한 오명(五名)의 임씨(林氏)가 등재(登載)된 것을 정사(正史)에서 찾을 수가 있으므로 동도시기(東渡時期)는 西紀八○○初로 보는 것이 정사(正史)와 접근할수 있으나 정확(正確)한 고증(考證)은 보다 많은 연구(硏究)가 요구(要求)된다.(제四편 농성 적조사보고서 참조 바람)
비간전(比干殿)
소재지(所在地) : 중국 복건성 남안시 관교진 내척촌
(본 비간전은 한국 순창관 순창종회 임윤화 도문 스님 주습으로 건축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