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창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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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양대(養大)요 호(號)는 두문재(杜門齋) 또는 휴암(休庵)이며 순창인(淳昌人)이다. 고려 의종조(毅宗朝)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고 시호(諡號)가 문정(文貞)인 광비(光庇)의 칠세손(七世孫)이며 진사검교(進士檢校)로 문장으로써 세상에 드날렸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사(三司使) 상장군(上將軍)에 추증(追贈)된 서하공(西河公) 춘(椿)의 육세손(六世孫)이고 순창백(淳昌伯) 좌정승(左政丞) 연(演)의 손자이며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며 찬성사(贊成事) 순창군(淳昌君)인 중연(仲沇)의 아들이다.
공(公)은 타고난 기질(氣質)이 높고 굳세었으며 숭고한 절의(節義)와 겸손한 덕성(德性)을 지니고 있었으며 대대(代代)로 충(忠)과 효(孝)로서 빛나는 가문(家門)에 태어나 효(孝)란 자기 자신의 수양(修養) 뿐만이 아니라 타인존중(他人尊重)과 경애사상(敬愛思想)이 앙양되는 백행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나이 겨우 약관 시절에 벼슬길에 올라 낭관(郎官:정오품(正五品))을 역임하고 태학궁(太學宮)에 나아가 학문이 넓고 의리를 밝혀 사문(斯文)과 세도(世道)를 붙잡아 세울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고 성석린(成石璘)과 박상충(朴尙衷) 홍중선(洪仲宣) 등 제현(諸賢)들과 친밀(親密)하게 교유하며 학문을 닦아 중용(中庸)의 도(道)를 바르게 실천하고 유도(儒道)를 천명(闡明)함에 그 명망이 세상을 움직였다.
여말(麗末) 풍속이 투박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단상(短喪)하여 백일(百日)에 탈상하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반남(潘南) 박상충(朴尙衷) 등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고례(古禮)를 참작 삼년상(三年喪)을 권장 강론(講論)하여 퇴폐한 세속(世俗)을 바로잡기에 힘써 모두가 3년상을 행하니 윤강이 서고 예법(禮法)도 이로부터 중(重)하게 여기게 되었다.
고려말기 국운(國運)이 저무는 간성왕(杆城王) 4년 드디어 혁명세력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게 되자 조의생(曺義生) 맹성인(孟姓人) 등 뜻을 같이하는 70여인에 앞장서서 거느리고 송도시동(松都市東) 남현(南峴)에 올라 조천관(朝天冠)을 소나무에 걸고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 망복(罔僕)의 신하로써 뜻을 각각 말할 때 공(公)은 이르기를 “오직 그 의리(義理)를 마땅히 쫒으리라” 하고 곡령의 서쪽 만수산(萬壽山)의 남쪽으로 함께 숨어 그 골짜기 어귀에 사립문을 하나씩 달고 늘 닫아둔 채 열지 않음으로써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확실하게 내비치어 스스로 유민(遊民)임을 자처하고 일민(逸民)이 될 것을 다짐하니 도의의 근원이 전왕(前王)을 잊지 않는 것이며 고려의 신하가 된 자는 마땅히 목숨을 다하는 것이 바른 군신(君臣)의 대의라 하고 신하가 마땅히 천리(天理)를 쫓아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맹세를 하였다.
이성계(李成桂)는 그들의 절의(節義)를 아름답게 생각하며 경덕궁(慶德宮)에 과거를 열고 그들의 잘못을 사면해서 거두어 등용하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끝내 과장에 나가 응시(應試)함이 없이 몸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단심(丹心)을 더욱 북돋고 깨끗한 절개를 더욱 굳히면서 벌걸주론(伐桀紂論)을 지어 이르기를 탕무(湯武)는 비록 성인이나 신분은 신하이며 걸주(桀紂)는 비록 폭군이나 자리는 임금이라 그런즉 신하로써 임금을 치는 것이 옳겠는가 우리는 그러므로 그 마음이 폭군을 없애어 백성을 구함에 있지 않고 천하를 취하는 데 있다고 말하노니 천하를 취하려고 마음 쓴 자가 어찌 성인이며 귀히 하는 천하의 마음이리요 탕무가 백성을 구함은 곧 얻음이라 천하 만세에 임금을 원망코자 하는 자는 반드시 탕무로써 구실을 붙여 변명할 것이다(杜門洞書院誌) 하였으니 선생의 웅어지의(熊魚之義)가 이미 본심에 굳게 결심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치악산(雉岳山) 정상에다 제단(祭壇)을 쌓고 고려의 종사(宗社)를 잇(繼)게 하고자 변혁사(變革祀)를 지낸데 이에 동지들과 더불어 동참(從參)하였다. 마침내 이성계(李成桂)가 두문동(杜門洞)에 불을 지르자 이에 항절불굴(抗節不屈)하고 깨끗한 그 절개를 더욱 굳히더니 그 생명을 버림에 미쳐서는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며 조의생(曺義生) 맹성인(孟姓人)과 함께 불속에서 분사순절(焚死殉節)하니 공(公)의 행적은 진퇴(進退)를 예(禮)대로 했고 출처(出處)를 도(道)대로 했으며 선왕(先王)에게 충심(忠心)을 바쳤으며 의(義)를 취(取)하고 생(生)을 버려 일생(一生)동안 지킨 바가 오직 의(義) 뿐이었다. 그 순충(純忠) 정절(貞節)은 위로는 왕실을 위하고 아래로는 풍교(風敎)를 붙잡았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은 때에 도모할 힘이 없었으니 공(公)의 한 번 죽음은 가히 임금에 대한 의리(義理)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것이며 신(臣)으로 멸륜(滅倫) 패의(悖義)하는 자를 깨우쳤다고 하리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순절로 보이니 모두가 감탄하여라 위대함이여 그 충의(忠義)와 명절(名節)이 능히 은나라 백이숙제(伯夷叔齊)와 진나라 개자추(介子推)와 더불어 백세천추(百世千秋)에 빛나리라 하였으며 도(道)를 확신(確信)함이 도(道)답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분명하다(信道 道而自知明)란 옛말대로 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전(典)과 숭모(崇慕)하는 성(誠)도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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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英祖大王) 16년 1740년 9월에 난여(鑾輿)를 준비시켜 후릉(厚陵)을 찾아 지나는 길목에 송도(松都)에 행행(行幸)하여 지나면서 지난 옛일을 물으니 이에 부로(父老)들이 대답하기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니 수레를 길에 세우게 하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탄식하더니 이곳은 충신(忠臣)의 유적지이다. 마땅히 이를 드러내 정포(旌褒)해야 할 것이다 하면서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 일곱 글자를 새겨 고개에 세우라고 하고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라는 글귀를 지어 수행한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또한 영조 27년 1752년 가을에 스스로 고려 충신이 이제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두문동에 비를 세워 절의를 표창하네 승국충신금언화(勝國忠臣今焉花) 특견기동표기절(特堅其洞表其節) 라는 글을 지어 비면을 어필로 쓰고 두문동에 비를 세우라고 명하고 아울러 음기(陰記)하였다. 그리고 또 두문동(杜門洞)에 개성유수 서종급(徐宗伋)을 파견하여 충신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니 그 제문은 두문동유적기(杜門洞遺蹟記)에 있다. 한편 두문동의 전조 충신의 절의를 추감(追感)하여 특별히 그 후손들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는 등 충신을 찬양하였다.
그 후 정조(正祖)는 1783년(정조 7년)에 유수(留守) 서유방(徐有防)의 상소로 송경에 표절사(表節祠)를 건립케 하고 표절이란 액호(額號)를 하사(下賜)하여 춘추로 치제 사액하였으니 제공(諸公)의 모르지 않은 영(靈)이 저승에서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요 추모하는 후인(後人)들도 우러러보기에 속시원하였으리라 선(善)을 포상하고 미(美)를 들춰냄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이렇게 하여 3충신의 이름과 행적이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에 밝게 빛나게 되었다.
1934년 공(公)의 후손 임하영(林河永)과 중심이 되어 두문동 서원을 건립하여 치제하고 장성(長城) 경현사(景賢祠)에 배향하였다가 순창(淳昌) 호계사(虎溪祠)와 화순(和順) 송월사(松月祠)에 위패를 배향하고 치제(致祭)를 하고 있으며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며 묘(墓)는 두문동후록증봉하(杜門洞後麓甑峯下)에 있고 슬하에 용배(用培) 용달(用達) 용계(用桂) 3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인 용배(用培)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순절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 매장하고 이성계의 금고형으로 벼슬길이 막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조부 연고지인 순창에 은거하였고 그 아들 남부교수 치지(致之)는 화순(和順)에 있는 화순 오씨(吳氏)에게 혼인하여 화순으로 옮겨 세거지를 이루었다.
둘째 용달(用達)은 송도(松都)에서 모진 세파를 극복하고 선영을 돌보면서 은거하여 세거지를 이루었으며 셋째 용계(用桂)는 장형과 순창에 은거하다가 홍성(洪城)에 세거지를 이루었다. 공(公)을 후세 사람들은 승국명류포방록(勝國名流枹榜錄)을 통해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맹성인(孟姓人) 3충신을 삼절(三節)이라 하고 장남 용배는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과 함께 구효(九孝) 중 한 분으로 찬양하고 있다.







